Distance: 권세진 Sejin Kwon
Q. 간단하게 본인을 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지필묵(종이, 붓, 먹)을 가지고 현실의 풍경을 그려내는 권세진입니다.
Q. 동양화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동양화는 전통을 기반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요. 옛 그림은 보면 볼수록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생활과 밀접한 부분도 있고 또한 화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대범한 구도에 놀랄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종이는 저에게 매력적인 재료입니다. 동양화는 먹을 머금은 붓이 종이에 닿으면서 번져나가는 점을 이용합니다. 이런 방식은 작가가 모든 것을 조절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료들이 만나서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러한 약간의 변수를 즐기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료가 종이에 스며들면서 만들어 내는 깊이와 공간감을 좋아해요.
Q. <Distance> 전시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이번 전시는 저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인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리’의 의미는 포괄적인데요. 이것은 물리적인 의미와 개념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고 모든 작업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거리의 의미도 있고 작품마다 다른 의미의 거리도 존재합니다. 공통적인 거리는 모두 대상과 작품 사이에 사진이 만들어 내는 ‘얇은 막’을 의미합니다. 왜냐면 저의 작업은 제가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내기 때문이죠. 차이점으로는 기억의 발화로 인해 변화하는 심리적 거리(트로피), 깊숙한 곳에서 다가오는 화면 속 공간감(파도), 그리고 광활한 자연과 여러 개의 레이어가 만드는 거리(이동 시점)를 의미합니다.
Q. 전시된 작품을 설명해 주세요.
<트로피>(2014)는 저의 초기 작업이에요. 오랜만에 부모님 집을 방문했는데, 먼지가 쌓인 유리 케이스 안의 트로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언제 받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더라고요. 이후에 트로피는 저의 작업에서 잊혀진 기억과 지나온 시간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트로피는 실제로 30cm 정도의 크기지만, 과거에 대한 상징물로서 거대한 기념비처럼 그려 봤습니다. 이 작품은 안료를 묽게 개어서 종이에 반복적으로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탈색된 듯한 빛바랜 색채와 얇고 투명한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러한 느낌이 ‘기억의 느낌’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트로피는 저에게 심리적 거리를 의미합니다. 누구나 오래된 사진이나 사물을 봤을 때, 그것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 불현듯 과거가 떠오르는 경험이 있을 거예요. 현재의 나와 멀게 느껴지던 과거가 다시 현재의 나와 친밀해지는 것을 심리적 거리라고 생각했어요.
몇 해 전 겨울, 부산 해운대에 갔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저는 멀리서 조금씩 밀려오는 파도의 물결을 오랫동안 관찰했어요. <바다를 구성하는 741개의 드로잉>(2020)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모습은 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림은 사실 고정된 하나의 장면이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파도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합니다. 잔잔히 파도가 내게 다가와서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러 점의 수면 연작을 제작했어요. 그 작품들은 주로 잔잔한 바다의 윤슬들이 반짝이는 평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작품은 운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작품들의 경우 빛의 반짝임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 작품은 상단 깊숙한 곳에서부터 해변 아래 발밑까지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깊숙한 곳에서 평평한 곳까지의 거리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다중시점>(2021)은 제주도 성산일출봉을 삼원법(*산수화 제작 시 사용되는 세 가지 투시도법으로 고원(高遠) · 심원(深遠) · 평원(平遠)을 지칭함.)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점(고원), 초원을 내려다보는 시점(심원), 그리고 멀리 있는 바다의 수평선은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점(평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 시점으로 찍은 사진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마침내 27장의 사진을 재조합해서 하나의 장면을 완성했습니다. 사진들은 시간의 단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빛의 노출이나 명암이 달라졌고, 콜라주를 하면서 외곽의 형태들은 미묘하게 어긋났습니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시점과 초점을 한 화면에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풍경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실제 우리 눈의 방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 생성되는 여러 층의 레이어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깊이감과 거리감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고 봅니다.
Q.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먼저 세 점의 대형 작품이 한 공간에 설치됐을 때, 공간이 선사하는 긴장감을 관람객이 느꼈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제작 시기나 기법 그리고 그려진 대상도 다르기 때문에 관람객은 이미지나 주제의 개연성을 궁금해할 것 같아요. 하지만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하기보다, 각 작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형식과 전시의 주제인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