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COMPASS: 이소정 Sojung Lee

4 September - 27 November 2021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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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의 개인전 <나침반>은 2021년 봄에 열린 <경첩들>전시를 준비하면서 제작된 실험작들로 이루어진다. 전시 제목을 <나침반>으로 정한 이유는 이후 작업의 궤적을 그리는 데에 있어 ‘나침반’이 되어준 작품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들은 이후 작업의 보다 정교한 제작 방식을 구축하기 위한 영감과 단서를 준 습작들이다. 또한 제작방식을 여러 갈래로 가지치고, 그들을 아우르는 지향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각성시켜주었다고 한다. 원래 나침반은 명확하게 한 방향을 제시하지만, 이소정의 ‘나침반’은 이후의 작업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즉, 다음 전시를 위한 표본이 되어준 것이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소정에게 큰 의미가 있다. 제주 출신인 작가는 작품에 자신이 대입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주에서 유년을 보내고 상경하여 성인시절을 보내면서, 작가가 세상에 반응하고 관계하는 방식은 시기별로 달라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모두 현재의 자신을 만든 것처럼, 작업에 사용한 다양한 기법과 방향성은 각각 새로운 연작을 완성하게 해주었다.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담고 있는 그림을 작가가 태어난 제주도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 깊은 전시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서예와 전각에 조예가 깊었기에, 이소정 역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서예와 전각, 그리고 한국화를 접했다. 그가 미술대학에 입학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작가는 ‘미술학부’로 입학했고, 1년간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시기를 경험했다. 그는 학부 1학년이 끝날 때쯤 전공과목을 결정하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한국화 재료를 일상적으로 접했고, 색연필보다는 모필이 친숙했다. 그에게 한국화는 너무 익숙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전공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집을 두고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서양화를 선택했다가 학과 사무실에 제출하기 직전 펜으로 찍찍 긋고 ‘한국화’로 바꿔 썼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소정에게 자연스러운 배경이었기에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재료 자체의 물성과 그들 사이의 관계이다. 재료의 물성에는 오랫동안 그 재료를 다룬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과 특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그는 ‘한국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성급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한국화)재료를 다루는 사람’이며, 그 물성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현상과 관계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는 재료를 실험하고 연구하는 동안, 그 궤적을 관통하는 문화적 특성과 정신성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비쳐 보이기를 바란다. 또한, 한국화 재료가 ‘지금의 눈’으로도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소화되는 ‘지금의 재료’ 중 하나로 여겨지기를 바란다고 한다.

 

작가는 <탐정들>(2019, 갤러리2)과 <경첩들>(2021, P21) 전시를 통해 그 동안 연구해온 실험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탐정들 연작의 계기는 우연했다. 어느 날 작업실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가 얼룩진(이전 작업들의 밑판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물감과 먹이 스며든) 종이를 보고, 그 자체가 지닌 완성도에 감탄하고 동시에 진한 애착을 느꼈다고 한다. 사람들은 우연적인 구름이나 얼룩을 보면 그 안에서 어떤 형상을 찾아낸다. 탐정들 연작에서, 그는 마치 탐정과 같이 우연한 흔적 안에 숨겨진 형상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경첩들 연작은 탐정들 연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두 연작은 분명 공통점을 갖는다. 하나는 화면 위에 물감이 묻은 종이를 스탬프처럼 찍어서 얼룩을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화면의 주인공(형상)이 아닌 배경을 칠해서 역으로 주인공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경첩들 연작에서는 종이가 구현할 수 있는 더욱 다양한 방식과 더불어 색을 다채롭게 사용했고 아크릴, 밀랍 등 비(非)한국화 재료로 여겨지는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연작 모두 우연한 흔적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마치 필연이라고 믿는 것을 전제로 작업을 이어갔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귤>은 종이 위에 떨어진 밀랍에 열을 가해 투명하게 만든 후 나머지 부분은 백록색 물감으로 칠한 작품이다. 그 색이 마르기 전에 먹을 묻힌 한지를 그림 위에 올리면, 삼투압에 의해 수분이 있는 곳에만 먹이 스며든다. 원래 그저 투명해야 할 밀랍 부분이 색을 띠는 이유는, 그 뒷면에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예전에 그렸던 뒷면의 그림이 비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난 후 배경은 금색 아크릴 물감으로 칠했다. <꽃>, <꽃잎>, <범용>은 마젠타색 물감이 묻은 종이를 필터 삼아 본 화면이 될 종이 위에 덮었다 걷어내어 우연한 얼룩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눕혀진 화면 위에 물을 붓고 화판을 흔들어 여러 갈래의 물길을 만들고, 그 물이 마르기 전에 다른 색 혹은 먹을 칠한 종이를 올려서 역시 삼투압을 이용하여 그 물길의 흔적에 색이 스며들게 했다. <꽃잎들>, <적운>은 물감이 묻은 종이를 화면 위에 찍어낸 후 주인공이 될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경이 될 부분을 칠해서 주인공이 드러나도록 했다. 삼투압, 물길, 배경 칠하기를 통해 주인공을 드러내기 등 작업의 제작과정에 작가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지만, 작가 자신도 예상치 못한 ‘우연의 결과’가 작품에 중심에 있다.

 

이소정은 전시가 될 작품과 그렇지 않을 작품을 미리 구분하지 않는다. 그림을 다 완성하고도 전시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작품은 전시의 맥락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작품은 조금 더 심화해서 새로운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공개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뒤늦게 해결 방법을 찾는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 이번 <나침반> 전시에서 소개된다. 작가는 언젠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아, 새로운 작품이 제주도 전시의 이 작품에서 나왔구나!’라고 누군가가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말은 이 작품들 안에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작업의 힌트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