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개인전: 이광호 Lee Kwang Ho

11 December 2021 - 13 February 2022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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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Natural History』에서는 사랑하는 청년이 멀리 떠나게 되자 램프의 빛으로 벽에 비친 청년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 어느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시선은 온전히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시선이 가는 곳에는 사랑이 있고, 그곳이 바로 형상이 태어나는 자리다. 이광호 작가의 일관된 주제 역시 ‘시선’이다. 짝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던 시선, 사랑하는 부인과 마주하는 시선, 120명의 초상화 모델을 관찰하는 시선, 식물의 표면을 탐구하는 시선. 그러나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린 여인과 이광호 작가는 차이가 있다. 그는 선이 아닌 붓질로 자신이 시선이 닿았던 대상의 표면, 그 촉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광호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경험하고 판단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학교 미술실에서 독학하듯 혼자서 그림을 그렸던 작가는 ‘눈에 보이는 저 사물을 어떻게 종이 위에 그럴싸하게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며 형태를 탐구했다고 한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 방법은 그 기나긴 수련 과정을 통해서 몸에 학습된 기술이기도 하다. 자신을 ‘사실주의 작가’로 규정한 적은 없다. 하지만 사실적인 묘사 방식에 대한 관심은 태생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 역시 무의미하다.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인물과 식물(선인장)을 주제로 했던 이광호 작가의 작업은 풍경화로 점철되었다. 인물이나 식물을 그릴 때 작가는 대상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눈으로 파악한 대상의 촉감을 재현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다. 어느 순간 작가는 자신과 대상이 혼연일체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연 풍경에 주목하게 됐다. 자연에 대한 감흥은 단지 눈이 아닌 몸의 반응에서 기인한다. 자연에 둘러싸이는 순간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이론이나 관념은 분쇄되고 그저 내 몸의 체험, 그 감각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자연 속에 있을 때 느끼는 자신의 감정과 몸으로 깨달은 자연의 형상을 화면에 재현하는 것이 그의 풍경 그림이다.

 

2017년부터 이광호 작가는 특히 습지 풍경에 주목한다. 작가는 뉴질랜드 여행 중 케플러 트랙 Kepler Track 언저리에 위치한 습지를 우연히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으로 습지 그림을 그렸고, 2018년에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전시 준비를 마치고 그는 다시 뉴질랜드의 습지로 향했다. 갤러리2 중선농원에 전시되는 작품은 2018년에 찍은 습지 사진에서 출발했다. 습지 풍경의 매력은 무엇보다 습지의 수면과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에 있다. 물의 투명한 성격은 수면 아래를 비추면서도 반사된 하늘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풀과 덤불이끼는 조밀하면서도 화려하게 수면을 점유한다. 이 요소들은 작가가 오랫동안 체득해 온 유화 기법을 통해 대상의 표면, 그 촉각적 심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수풀과 덤불이끼의 묘사는 뾰족한 판화용 도구로 화면을 긁고, 고무 붓으로 물감을 툭툭 내던짐으로써 완성된다. 두 기법은 작가가 독대한 자연의 형상을 극대화 시킨다. 이를 통해 습지 풍경은 온전한 생명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몸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과정으로 보면 화면을 긁고 물감을 찍어내는 것은 그림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잘 그려진 풍경 이미지를 다시 해체하는 듯하다. 그는 이 마지막 단계를 위해 붓으로 형상을 섬세하게 그리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림을 완성하는 그의 독특한 마무리 방식은 형상을 다시 흐트러트린다는 쾌감과 대상의 촉각적 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는 극적인 효과를 동시에 실현한다.

 

이광호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신이 습지에서 경험한 것이 관람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길 바라고 있다. 그는 자연 안에 있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자연과 자신이 서로 마주 보는 그 순간에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어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온다고 한다. 이 아름다움을 공감해줄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에 봤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노스텔지어 Nostalghia> 속 대사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혼자서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작가가 그토록 쫓고 있던 시선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닌 둘이 한 곳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이었나 보다.